<양평누비기 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1907년(丁未)에 봉기한 정미의병〔丁未義兵,‘후기의병’ 또는 ‘제3차(기)의병’이라고도 함〕은 7월19일 고종의 강제퇴위와 7월 24일의 정미7조약의 체결, 그리고 8월 1일의 군대해산으로 국권방위(國權防衛)를 목적으로 일어난 의병전쟁이었다. 그해 8월 해산군(解散軍)인 원주 진위대의 특무정교였던 민긍호(閔肯鎬)가 창의함으로써 정미의병의 선도적 역할을 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을미의병 때 활약했던 이강년(李康秊)이 제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민긍호 의병부대와 함께 강원·충청·경상·경기일원에서 기세를 떨쳤다.

양평에서도 여러 의진이 활약했다. 양평출신 조인환(趙仁煥)은 권득수(權得洙)와 함께 용문산의 상원사와 용문사를 근거지삼아 활동했다. 이들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일제 군경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도 하고 분산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07년 9월 초순 조인환 의병부대가 경원(京元)-경의(京義) 가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일제는 보병 제52연대를 동원하여 이들의 진압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의 진압 군경은 용문의 장수동(長壽洞) 연안막(連安幕)을 습격한 후 상원사·용문사에 비치한 의병의 군량과 군수물자를 찾아내어 불태워버렸다. 의병의 근거지라 하여 유서 깊은 사찰인 상원사와 용문사는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에 의해 1907년 8월24일과 25일 양일간 불태워 졌으며, 사나사는 그 해 10월27일 일본군 보병 제51연대 제11중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양근읍내 민가 수백 호를 불태우고 용문(龍門)의 기독교인 가옥 14호와 평민 가옥 6호를 소각했다. 주민들이 의병에 협조해준 것에 대한 일제의 잔혹한 보복조치였던 것이다.

의병의 인적 손실도 컸다. 조인환 의병부대는 분원동(分院洞)에서 20여명의 부하를 잃었고 이후 조인환은 의병부대를 이탈했다. 그러자 그 부하들은 해산군인 출신의 신창현(申昌鉉)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9월 하순 부대를 정비한 신창현은 일본군 보병 제52연대의 1개 소대를 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일제 측의 이어진 공격으로 부하 27명이 전사하는 타격을 받았다. 10월경 신창현 등 의병 300여 명은 강원도 인제로 이동하여 민긍호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13도 연합의진에 참여했다. 그 후 그는 강원도에서 이구채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일본 군경과 10여 차례나 교전했다. 그러나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후인 1908년 6월18일 그는 서울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김춘수는 강원도 홍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부하 200명을 이끌고 양평을 비롯한 광주·가평·홍천 등 경기도와 강원도를 넘나들며 활동했다. 1908년 4월 그는 부하 70~80명을 이끌고 가평·양주·홍천 등지에서 방곡령을 지시하는 한편, 각 면장과 동장들에게 군수품의 조달을 요청했다. 이들은 주로 화약이나 화승(火繩) 및 탄환, 또는 짚신이나 식량 등을 요구했다. 그는 그해 4월에 가평군에서 체포되었는데, 얼마 뒤 탈옥해서 다시 활동하다가 1909년 12월 자수했다.

한편 최대평은 부하 300명을 인솔하고 양평을 주요 활동무대로 삼아 인근 지역을 넘나들며 활동했다. 그는 1907년 8월경 서울을 습격할 목적으로 남종면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기도 했다. 최대평은 그해 12월 하순 의병항쟁을 포기하고 투항했으나, 1910년 1월 군자금 모집을 한 것으로 보아 다시 의병에 투신하여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군대 해산 시 정위였던 권중식(權仲植)은 양근을 근거지로 삼아 해산군인들과 산포(山砲)들로 구성된 의병을 조직했다. 그는 경기관찰사에게 수원 용주사(龍珠寺)로 군수품을 보내라는 격문을 발송했다. 1907년 가을 영국의 신문기자 맥켄지가 양근을 지나다 의병을 만나고 의병사진을 남겨 지금까지도 한말의병의 상징이 되고 있다. 이 사진은 그가 쓴 『대한제국의 비극』에 실린 것으로 양평군 양평읍 오빈리 또는 옥천면 아신리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이 책 본문의 내용과 배경이 된 뒷산의 능선모습으로 보아 전자가 맞는 것으로 보여지며, 향토사학자들 군복을 입은 의병은 군인출신인 권중식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또한, 관동병영장(關東兵營將) 정대무(丁大武)가 지평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08년 음력 정월 부대를 해산하고 귀순하자, 그 부대의 선봉장 김응서(金應西)가 독립하여 활동하던 중 13도 연합의진에 참여했다. 하지만 1908년 3월 중순 그는 지평에서 체포되어 일제 헌병대에 의해 사살되고 말았다.

또한 이 무렵 경기도 임진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허위(許蔿) 의병부대와 이인영 의병부대 등 여러 의진이 연합하는 등 전국 각지의 의병 부대는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으로, 허위를 군사장으로 추대하였다. 전국에서 모여 13도 창의군을 결성한 의병 1만여명은 교통이 편리한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진공 작전을 전개했다. 허위가 이끄는 300명의 선발대가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했으나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패배하여 의병사상 최초로 전국의 의진이 힘을 합해 시도한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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