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인터뷰> 김평일 제1가나안농군학교 교장

가나안농군학교, 100년이 가도 변하지 않을 가치

5000만명이 ‘250알 밥 한술’ 아끼면 125명 먹고 살아
“음식쓰레기·사교육비·성형비만 줄여도 굶어죽지 않아”

 

한 30년 전 부산서, 한 선배가 가나안농군학교라는 곳을 다녀왔는데 몹시 빡센 곳이었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화장실 휴지를 칸을 정해 쓰게 한다는 거였다. 쾌변 시는 3칸! “그게 가능해?” 다들 한참을 웃었다. 그런 추억 속의 학교가 양평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분이 묘했다. 뭐랄까… 그 시절엔 개척자와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함께 나이 들어버린 느낌이랄까. 한편으로는 아직도 그 선배의 증언처럼 교육을 하는지도 궁금했다. 가나안농군학교 이름을 듣고 ‘참 훌륭한 학교였지…’하며 추억에 잠기실 분들이 많을 듯하다. 김평일 교장선생님께 반세기를 이어온 학교이야기를 들어보자.

 

- 가나안농군학교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독립운동을 하셨던 아버님이, 우리가 못 살고 힘이 없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는데 해방이 되었다고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고 생각하셨지요. 그래서 ‘잘 살아야겠다,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를 고심하시다 모든 걸 바꿔야한다는 결론을 내리시고 의식주 개선을 먼저 시작하셨어요. 의생활은 간소복을 만드셨어요. 식생활은 시간절약과 영양섭취를 위해 빵, 계란, 우유 중심의 개량식으로 바꿔 여성을 부엌에서 해방시키셨죠. 주택도 한옥의 약점을 보완해 벽을 두껍게 하고 창을 이중창으로 크게 해서 햇빛과 바람이 잘 들게 해 생활하기에도 좋고 건강에도 좋도록 바꾸셨어요.

국민소득 3만불 시대를 앞두고 있다지만 김평일 가나안농군학교 교장에게 교육은 밭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은 고귀한 행위다. 우리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사교육비와 음식쓰레기, 성형비용만 줄여도 굶어죽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사진=용은성 기자 yes@ypsori.com

정신적으로는 긍정적인 생각과 감사한 마음을 강조하셨고요. 우리나라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잖아요. 사촌이면 아버지 동생인데 형제가 잘 되는 것도 싫다는 거잖아요. 5천년 역사지만 가난하게 살다보니 잘못된 생각이 많았어요. 그래서 ‘칭찬을 많이 해라, 남 잘 되는 걸 좋아해라, 일은 열심히 해라’고 한 거죠. 생활면에서는 더 잘 살려면 아끼고 절약해야 한다. 알맞게, 적당하게, 필요한 만큼 쓰자, 더 많이 쓴다고 더 깨끗한 게 아니다, 비누도 남자는 세 번, 여자는 네 번 문지르면 된다, 치약도 3㎜면 충분하다, 이런 실제적인 지침도 만드셨죠. 이런 것들을 실천하시며 ‘이상촌’이라는 공동체로 사셨어요. 많은 분들이 학교를 만들어 가르쳐달라고 해서 1962년에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우신 거죠.”

- 양평은 언제 문을 연 건가요?

“1962년 하남에 제1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우고 쭉 그곳에 있다가 하남시에 보금자리 아파트가 생기면서 이전했습니다. 2011년부터 이곳을 개척하기 시작해 2014년에 양평으로 왔습니다.”

 

- 새마을운동이 가나안농군학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새마을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북한을 봐도 옳은 게 있고 나쁜 게 있잖아요. 남한도 대통령이 10명인가 지나갔는데 잘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다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5·16혁명(쿠데타라고도 하지만)을 일으킨 뒤 최고회의 의장 시절 최고위원 30명을 데리고 학교에 왔어요. 아버님이 ‘군인이 국방을 지키지 왜 혁명을 일으켜서 이렇게 하느냐’고 물으셨어요. 당시 박정희 장군이 “우리나라 형편이 얼마나 어렵나, 내가 군인이라도 잘 살게 만들고 다시 군인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정권을 잡으니까 어떻게 잘 살게 만들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주변에 알아보니 김용기 선생을 찾아가라 그래서 찾아왔다’고 하더래요. 당시 총을 가지고 왔는데 서슬이 시퍼렇던 때라 한 마디도 못하던 시절이었어요. 식사시간이 되어 식탁에 앉았는데 박정희 의장이 먼저 빵을 입에 물었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의장님은 3천만의 대통령이지만 저는 우리 식구 27명의 대통령입니다. 여기 식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밥 먹기 전에 식탁의 노래를 부르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합니다’하고 한마디 하신 거죠. 그러자 박정희 의장이 입에 물었던 빵을 빼고 모두 고개 숙이고 기도했어요. 신문에도 났는데 기도를 굉장히 길게 했어요. 기도 후에는 하던 대로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 음식 한 끼에 반드시 4시간씩 일하고 먹자’ 구호도 외치고요.

 

김평일 교장은 아버지 김용기 장로(왼쪽)가 생전에 그랬듯 매일 새벽 5시 산소통을 개조한 ‘개척종’을 타종한다.

그분이 감동을 받아서 ‘내가 뭘 도와드릴까요?’하고 물었는데 아버님이 ‘말씀은 고맙지만 안 도와주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라고 사양하셨어요. 그때 도움을 안 받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박근혜 대통령도 한나라당 총재 때 ‘새마을운동을 하게 된 건 김용기 선생님께 영감을 받아서였습니다’하고 저한테 그러셨지요. 우리가 새벽 5시에 종을 치고 일어난다 했더니 새마을운동 노래에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그 노래도 여기서 착안한 거지요.”

 

- 교육과정을 보니 2박3일 과정이 기본인 것 같은데 주로 뭘 교육하시는지요?

“처음에는 14박15일이었어요. 노는 사람도 많고 할 일이 없으니 엄청나게 많이 왔어요. 그런데 점점 잘 살게 되니 바빠져서 시간을 낼 수가 없는 거죠. 점점 줄어 2박3일이 됐지요. 때에 따라 1박2일도 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부터 열 가지를 다 가르쳤어요. 그런데 요즘은 지역마다 교육이 잘 되어 있으니 우리 학교에서는 그런 교육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 교육을 합니다. 공무원을 하든, 장사를 하든 기본 정신이 있어야 해요. 돈을 버는 목적이 뭐냐? 절약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것들이죠. 많은 부를 얻게 되면 능력 있는 사람이 나눠줘야 한다는 거죠. 오는 분들에 따라 원하는 분야의 전문가를 모셔서 가르치기도 하고요. 요즘은 체험을 많이 원해요. 배가 어떻게 열리는지 보게 하고 계절에 따라 배꽃도 따고 종이도 씌우고 배도 따고 하죠. 정신교육은 이곳에서 하고 체험교육은 지역민들과 연계해서 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좋아’ 이러면 일찍 재우고, ‘밥알을 흘리지 말아라’ 하면 여기선 아이들도 안 흘립니다. 쌀 한 톨이 나오기 위해 88번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한 수저가 250알인데 5천만이 아끼면 125명이 같이 먹고 산다. 이런 것들을 가르칩니다.”

 

- 주로 어디서 교육을 받으러 오나요?

“외국의 못 사는 나라들이 자기네보다 못 살던 나라가 잘 사니까 배우러 옵니다. 아프리카, 동남아 이름 모를 나라에서 많이 옵니다. 국내에서는 기업체들이 오는데 회사가 교육하기 힘든 것들을 저희가 가르치기도 합니다. 애국심, 애사심 이런 것들은 가르치면 안 듣는 것 같아도 다 들어요. ‘니들 밥알 남기지 말어!’ 하면 ‘잘 사는 나라가 소비가 미덕인데…’ 합니다. 그런데 집에 가서 자식들에게 밥 흘리지 마라, 치약은 조금 써라 하고 가르칩니다. 요즘은 머리가 좋아서 집단교육에 대한 저항감이 있지만 듣고 영향을 받습니다. 저희는 교육이 밭에 씨를 뿌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건이 안 맞아서 안 나오는 거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지만 눈 감고 있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귀는 뚫려 있잖아요. 가정에서 아이들이 하는 걸 보고 실천하며 싹이 나옵니다. 가나안교육은 씨 뿌리는 교육이다. 여건이 맞으면 싹이 난다. 그렇게 봅니다.

김평일 교장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는 구호에 이어 ‘효도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를 새로운 교육 모토로 세워 교육생들에게 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공무원들도 많이 오고 법무연수원에서도 오고 예전엔 기자들도 많이 왔어요. 입교식할 때 그런 이야길 합니다. 절대 배우려고 하지 마라. 누가 누굴 가르치나. 우리는 남이 이루지 못한 걸 이루었다. 앞만 보고 뛰었다. 40년 만에 기적을 일으켰다. 그런데 3만불 시대에도 그렇게 갈 거냐? 이제는 옆도 뒤도 보며 가야한다. 이런 맑은 곳에서 자신을 생각하는 기회를 가져봐라. 앞만 보고 뛸 거냐. 여기에서 주는 너 자신이고 강사들은 반찬이다. 깊이깊이 생각해서 이런 국민, 이런 회사원, 가정에서 이런 역할을 하겠다라는 결심하는 시간을 가져라.”

 

- 오늘날처럼 부유함에 물든 세대에는 강의가 좀 어렵지 않은지요?

“3만불 시대라고 하지만 사람에 따라 몇 천불인 사람도 있고 몇 십만불인 사람도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차이가 나지요. 스스로 나눠주면 좋은데 안 줍니다. 이걸 바꿔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죽으면서 남은 집 한 채 자식주려는 마음이나, 기업가가 몇 십조를 자식에게 주는 마음이 똑같습니다. 예전에는 새마을운동이 먹힌 게 못 사니까 사람이 줄을 서서 좁게 자도 암말 안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조금의 불편함도 못 참아요. 돈이 있거나 없거나 온 국민이 휴가를 갑니다. 주말이면 양평 길이 미어지잖아요. 그 사람들이 다 (풍족한 재산이)있느냐? 아닙니다. 세계화시대에는 더 절약해서 70억이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게 될 때까지 더 절약하고 아껴야 합니다. 음식 쓰레기가 20조, 사교육비 25조, 성형비 5조… 이런 것들만 합쳐도 굶어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희 집안이 기독교가 5대째인데 기독교도 너무 잘못하고 있습니다. 큰 교회들 자기가 먹고 다 쓰지 말고 어려운 사람 많이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을 도와줘야지요.”

 

- 며칠간의 교육으로 교육효과가 있는지요?

“예전에는 교육을 받고 삭발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자신의 삶을 바꾸겠다는 표현이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가도 머리가 자라면 도루묵이 돼요. 반대로 교육을 받아도 미지근한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의외로 지금까지도 실천하는 사람이 있어요. 뭐냐면 사람에 달렸어요. 하루를 해도 느끼는 사람은 느끼고 보름을 교육받아도 안 하는 사람은 안 해요. 옳다고 생각하면 씨를 계속 뿌리는 수밖에 없어요. 듣던지 안 듣던지. 어느 회사 상무가 다녀갔는데 5번까지 오시더군요. 6번째는 안 오길래 전화했더니 ‘5번 받고나니 내 것이 되어서 그렇게 살 수 있게 됐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산소통으로 만든 일명 ‘개척종’과 함께 가나안농군학교의 상징인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 표지석.

-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하남서 이전 준비할 때 여러 곳에서 서로 유치하려고 애를 썼어요. 그런데 양평을 선택한 건 우리 고향(남양주 봉안)과 가깝고 몽양 선생(아버님 김용기 선생은 독립운동하실 때 몽양선생과 인연이 있어 해방 직후 봉안 이상촌에서 몽양 선생님을 잠시 모시기도 했고 회갑도 해드린 사이다)을 좋아하기도 하고 특별히 김선교 군수님이 꼭 오시라고 부탁을 하셨어요. 군수로 두 번째 출마할 때 공약으로 가나안농군학교 유치를 공약으로 내세우기도 했지요. 그런데 지난 2년간 전국에서 교육을 받으러 오는데 정작 양평지역에서는 교육 받으러 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 게 좀 아쉬웠어요.”

 

세상이 급변했다. 더 이상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고 총으로 국민을 다스릴 수도 없다. 그런데 정말 가치 있고 보배로운 것들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가나안농군학교가 추구하는 이상이 그렇다. 자칫 구식 같아 보이고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이 학교의 가르침은 사실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몸은 더 풍요로워졌으나 마음이 가난해진 이들이 이곳에서 나눔으로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가르침을 받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정신으로 새롭게 살고 싶은 이들에게 이곳을 추천한다. 그리고 꼭 한분을 모실 수 있다면 가나안농군학교가 새마을운동의 근간이었다고 이야기한 박근혜 대통령이 이곳을 꼭 방문하면 좋겠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도와줄 것이라 믿는다.

홈페이지 http://www.kor-canaan.or.kr, 문의 ☎ 031-774-6152

이경희 객원기자는 소싯적 의상디자이너, 출판기획편집자, NGO 홍보팀장으로 일했다. 경남 산청 시골 출신이라 서울서 늘 흙을 그리워했다. 5년 전 양평으로 이사해 놀멍쉴멍 글도 쓰고 책도 만들며 남편과 두 딸 아이와 지지고 볶으며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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