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식업 성공스토리> 능수엄마

48회 눈물을 안고 떠난 여자

 

사장님, 와 지를 밀어내기만 하십니꺼. 와 한 번도 지를 쓰다듬어 주지 않으십니꺼. 인자부터 지는 암흑 속에서 살아갈 겁니더. 지가 떠나지 않았으모 죽는 도리밖에 없었지예. 지는 죽는 걸로 사장님에게 복수할 맘였어예.

 

죽일 년! 네가 춘천옥 떠나는 걸 그처럼 쉽게 결정하다니. 아무리 네 몸을 받아주지 않을망정 춘천옥만은 뜨지 말았어야지. 너는 춘천옥을 네 신전으로 여기지 않고 아무 때나 그만둘 수 있는 식당으로 여겼단 말이냐, 이 죽일 년아, 나는 네가 춘천옥을 네 신전으로 받드는 줄만 알았다, 하느님, 저년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주소서!

 

그날 밤 나는 혼자 밖에 나가 술을 마셨다. 술기운이 오르자 눈앞에 능수엄마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그녀의 환영이 슬피 울었다.
사장님, 와 지를 밀어내기만 하십니꺼. 와 한 번도 지를 쓰다듬어 주지 않으십니꺼. 인자부터 지는 암흑 속에서 살아갈 겁니더. 지가 떠나지 않았으모 죽는 도리밖에 없었지예. 지는 죽는 걸로 사장님에게 복수할 맘였어예. 사장님, 와 지한테 고통을 안겨주셨심꺼? 와 지한테 행복보다 고통을 탐내라고 말씀하셨심꺼?
그녀의 환영은 계속 서럽게 울었다. 나는 술잔을 연거푸 비워냈다. 술로 내 몸을 녹일 작정이었다.
미안하다. 내가 네게 더 이상 해줄 게 없구나. 나는 네가 오래오래 내 곁에 머물러 인생을 배우고 세상살이를 배워서 나비처럼 훨훨 날기를 바랐니라.

 

#
“능수엄마는 아무 때고 헤어질 여자니까 너무 상심 말아요. 당신과 함께 지낼수록 그 여자 마음에는 고통만 쌓여요. 장사에 지장은 크겠지만, 장사 땜에 당신이 계속 끌려다닐 순 없잖아요? 솔직히 나도 그런 꼴 더 보기 싫어요.”
아내가 모처럼 속마음을 드러낸다.
“그런 꼴이라니? 내가 능수엄마와 무슨 일이 있다는 거야?”
“지금 능수엄마 땜에 그러는 게 아녜요.”
“그럼 왜지?”
“몰라서 물어요?”
아내가 눈을 흘긴다. 능수엄마 때문에 풀이 죽어 있는 남편의 모습을 이해는 하면서도 옛일을 생각하면 은근히 화가 치미는 모양이다.
“또 그 얘길 꺼내는군.”
“아무리 지우려 해도......”
아내는 눈자위가 뜨거워지는지 얼른 고개를 숙인다. 그 일만 떠오르면 아내의 눈자위는 붉어지게 마련이고, 그때마다 나는 몸을 사리고 숨을 죽여야 한다. 참으로 지겨운 추억이다. 십여 년 전 일이다. 모처럼 고교 동창들과 어울린 자리에서 나는 젊은 미망인 사업가 노경진을 소개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아주 사교적인 성격에 미모가 빼어난 여성이었다. 아내와 포장마차로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가던 나로서는 노경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도 민망해서 고개를 돌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틀이 멀다하고 서초동에서 봉천동까지 친구들을 데리고 찾아와 매상을 올려주곤 했다.
“도대체 이해가 안 가요. 이처럼 깨끗하고 지적인 분들이 길거리에서 오뎅과 홍합을 삶아 팔다뇨.”
아내와 나는 노경진의 말에서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어느새 노경진은 아내를 언니라고 부르며 아내의 착한 인상을 추어주기도 했다.
“언니 얼굴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내가 바보라 그래요.”
“저 같은 사람은 바보가 될 수 없어 걱정이죠. 바보보다 더 무서운 존재는 없거든요.”
삼 개월쯤 지나자 노경진은 이런 제안을 했다.
“기 선생님을 우리 회사에 모시고 싶어요. 마땅한 직책이 없으니 회사 고문 역으로 명함을 새기고, 회사 사옥 후면에 붙어 있는 별채를 고문실로 꾸밀 참에요. 언니와 자녀들도 지금 살고 계신 봉천동에 전셋집을 구하겠으니 깨끗한 환경에서 사시도록 해요.”
우리 부부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우리들의 인성을 높이 샀다 해도 이런 횡재를 안겨주다니, 나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노경진은 막무가냈다.
“선생님 같은 인재를 구했으니 오히려 제가 덕을 보는 셈이죠.”
노경진은 내 꿈을 되살려주기도 했다. 회사 일은 큰일만 봐주고 별채에서 조용히 소설 창작에 몰두하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나를 사장님 대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녀의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호칭이었다. 작가 생활을 내 운명으로 간파한 노경진은 그렇게 내 마음을 사려고 애썼던 것이다.
나는 가난에 지친 데다 작가의 꿈을 키울 기회다 싶어 노경진의 유혹에 깊이 빠져들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소망해온 소설 창작에 전염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노경진은 소설 집필실을 핑계 삼아 내 마음을 살 수 있었고, 아내에게는 업무를 핑계 삼아 별채를 밀회장소로 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내를 이런 말로 설득했다.
“낯선 의류계에서 성공하려면 밤을 지샐 날이 많을 테고, 그렇게 올인하려면 회사 곁에 머물러야 효율적이죠. 그러니 언니가 이해해주세요. 그 대신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집에 가시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아내를 속이는 짓이 마음에 걸렸지만 경제적으로 성공할 때까지만 참고 견디자며 설득했다.
“노 사장은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친정 식구들은 돌봐주긴커녕 뜯어먹는 데만 기를 쓰거든. 그래서 노 사장은 나를 든든한 울타리로 여기고 있단 말야. 사업체는 큰데 어린 딸과 둘뿐이잖아. 솔직히 그 여자야말로 나 같은 사람 만난 게 홍복이지. 나야 말로 양심 바르고 관리능력이 뛰어난 사람인데 어디서 나 같은 일꾼을 구하겠어. 노 사장이 남편감 만날 때까지만 열심히 돌봐주면 한 밑천 챙길 수 있다구.”
“한 밑천 챙기다뇨? 왜 그런 흉한 말을 하죠?”
“흉한 말이 아냐. 노 사장이 공정한 대가를 치러줄 여자다 그 말이지. 나 같은 인간이 비리를 저지르겠어? 요령껏 빼먹어라 해도 못 빼먹을 인간이잖아.”
“노 사장이 의리를 저버리면요?”
“저버리면 할 수 없지. 저버려도 얻는 게 많아. 포장마차에 거는 희망보다야 더 낫잖겠어? 노 사장은 재혼해도 십 년쯤 후에나 생각해볼 일이라고 했어. 그러니 십 년 간 열심히 저축하면 큰 밑천을 쥘 수 있거든. 또 기술과 경영술을 익히게 되면 우리가 회사를 차릴 수도 있고. 노 사장도 그런 말을 했어. 열심히 배워서 성공해보라고.”

김용만 소설가(잔아문학박물관 관장)

“노 사장이 혹 당신을 노리는 거라면 어떠죠?”
“어이구, 우리 마나님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당신에게 보여준 게 있잖아.”
“뭘 보여줬는데요?”
“그동안 자식 낳고 살아오면서 당신이 이해하고 느꼈을 내 인격! 내 지조!”

저작권자 © 양평시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