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식업 성공스토리> 능수엄마

43회 병원 원장 사모님이 직원으로 위장 취업

 

우리 업소에는 부잣집 사모님들이 후줄근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소문난 업소이고 보니 새로 식당업을 해보고 싶은 분들이 노하우를 배우려고 찾아오는 거죠. 그런 분들은 한두 달 정도 일하다가 장사 노하우를 조금 익히면 사라지게 마련이죠.

 

그런 그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극장식 식당을 차렸고, 서울 시내 요지마다에 분점을 차려서 당시로서는 우수 기업체의 외형을 능가하는 매상을 올렸다. 분점마다 냉면집이라기보다 무슨 제품 공장이나 진배없었다. 냉면 단일메뉴여서 주방팀이 쭉 늘어서서 마치 공장의 생산라인처럼 움직인다. 주방장이 솥에서 건져올린 사리를 찬물에 헹궈내 탕기에 담아내면, 다음 사람이 수저로 양념(다대기)을 정확히 떠서 사리에 얹고, 다음 사람이 그 위에 무김치나 열무김치와 오이채를 얹고, 다음 사람이 그 위에 기름을 뿌리고 고기를 얹으면 다음 사람이 계란을 얹고 육수를 촉촉이 부어서 내놓으면 서빙팀이 쟁반에 담아간다. 모든 게 기계적이다. 사장은 아침에 지시만 하고 바깥일을 본다.
이제 사장은 해외에서 다른 사업에도 진출했고, 해외 일류대학의 운영에까지 손을 댄 국제적인 인물로 성장했다. 요식업을 ‘밥장사’ 라고 폄하하던 시절에 서울 법대를 나와 냉면장사를 시작한 그 선배가 지금도 자랑스럽기만 하다. 작은 체구에 면을 뽑는 틀에 대롱대롱 매달려 땀을 흘리는 모습이 처량해 보이지만 그런 근면이 대규모 업체를 일궈낸 것이다. 한국에서 처음 극장식 식당을 차려 성공한 사람도 그였는데 요식업 분야에 나름의 철학을 지닌 사업가였다. 실사구시 철학을 신봉한 그는 함경도가 고향이었다. 만약 그 시절 남한의 정서였다면 대서방은 차렸을망정 밥장사에는 등을 돌렸을 것이다. “일류대학을 나와 기껏 밥장사야?” 그런 홀대쯤은 너털웃음으로 때워버릴 그였다. 그는 오륙년 만에 서울 시내에 커다란 빌딩을 장만했고, 장학회를 만들어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학비 지원에 애썼다. 심지어 외국 명문대에도 장학금을 지원했는데 그래도 그의 이미지에는 ‘밥장사’ 란 주홍글씨가 매달려 있었다. 그것이 한국사회의 허위의식이었다.
“어느 나이든 지인이 그러더군. 당신 한 달에 얼마나 벌어? 그래서 별로 못 벌어요, 했지만 속으로는 당신이 평생 지녀온 총재산보다 많을 거요, 그러고 싶었어.”
그의 그런 말 속에는 나를 위로해주기 위한 덕담이 묻어 있었다. 내 몸에도 보이지 않는 주홍글씨가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아침에 장사 준비를 하는데 살결이 맑고 귀티가 흐르는 40대 여인이 보따리를 들고 홀에 들어선다. 일자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나는 두리번거리는 그녀를 의자에 앉혀놓고 손부터 훔쳐본다. 손가락에 반지 낀 자리가 보이고 손등이 매끄럽다. 곱게 살아온 흔적이 역력하다. 보나마나 고급 반지를 끼었을 것이다. 직원으로 일할 여자가 아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경험 있으세요?”
“네.”
“고생한 분 같잖은데요?”
“남편 사업이 갑자기 무너지는 바람에....”
“고생한 손이 이렇게 고울 순 없죠.”
“원래 피부가 고와서....”
“아무리 피부가 고와도 일한 손은 물때가 끼고 거칠게 마련인데요?”
“아녜요. 식당일 많이 해봤어요.”
“반지는 어쨌어요?”
“네?”
“다이어 반지를 빼고 오셨군요. 무명지에 링 흔적이 역력하잖아요? 일을 배우겠다고, 솔직히 말씀하시잖구. 우리 업소에는 부잣집 사모님들이 후줄근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소문난 업소이고 보니 새로 식당업을 해보고 싶은 분들이 노하우를 배우려고 찾아오는 거죠. 그런 분들은 한두 달 정도 일하다가 장사 노하우를 조금 익히면 사라지게 마련이죠.”
“죄송해요. 실은 남편이 산부인과 원장예요.”
“그런 분이 왜 식당업을 하실려고요?”
“생각해보시면 알잖아요? 만날 여자 다리를 벌리는 게 직업인데.... 그 때문에 남편은 술독에 빠져 산다구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밥장사가 쉬운 게 아닙니다. 밥장사는 더 괴롭고 힘들어요. 당장 후회하실 겁니다.”
“의지 나름이겠죠.”
“의지? 옳은 말씀에요. 하지만 어떤 극한적인 상항에 처해보지 않고는 성공하기 힘듭니다.”
“극한적인 상항이라뇨?”
“예를 들어 똑같은 신체조건을 갖춘 두 사람이 있다고 해요. 그 둘이 천길 낭떠러지 위에 매달려 있는데 한 사람은 발밑에 그물이 쳐져 있다면 누가 오래 버틸까요?”
“발밑에 그물 쳐진 사람이 먼저 떨어지겠죠.”
“맞아요. 그물이 산부인과 병원인 셈이죠. 아무리 규모가 큰 업소를 차린다 해도 식당을 하다보면 당장 병원 생각이 나게 마련입니다. 내가 미쳤다고 식당을 차렸나, 그렇게 후회할 때가 있다 그 말입니다.”
“죄송해요. 식당업을 해보고 싶어서....”

“굳이 일하시고 싶다면 좋습니다만. 병원장 사모님이 뭐가 아쉬워서, 고생을 사서하시렵니까?”
“돈 싫어하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돈이 곧 식당이라. 식당만 차리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나는 커피를 대접하며 일부러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호만 나면 큰돈 벌 수 있잖아요.”
“물론이죠. 하지만 삶의 질도 무시할 순 없잖아요?”
“품위를 말씀하시나 본데....”
“아직도 한국 사회는 밥장사를 폄하하잖아요.”
“한국도 곧 요식업을 자랑으로 여길 날이 올 거예요. 주방장이 탤런트처럼 인기 있는 날이 올 거라구요.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 치고 과음 않는 사람 있는 줄 아세요?”
이해되는 말이다. 내 친구가 떠오른다. 산부인과 전문의인 그도 소주를 맥주컵에 따라 마신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우너장부인은 열심히 상을 닦고, 의자를 정리하고, 젓가락통과 휴지통을 채우고, 물컵을 정리하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합세해서 방바닥을 걸레로 닦는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젖는다. 나는 그녀를 불러 주방에 들어가 보라고 했다. 신입자는 함부로 주방에 들이지 않지만 일을 포기할 여자 같아서 일부러 들여보냈다. 핵심 노하우인 양념 배합은 이미 직원이 출근하기 전에 아내가 끝내놨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보통 주부들이 주방에서 만드는 양념에 불과하지만 미세한 차이가 맛을 가르게 마련이다. 막국수의 경우 숙련공이 되려면 최소한 2년 정도는 손끝에 익혀야 감을 잡을 수 있다.

김용만 소설가(잔아문학박물관 관장)

“하실 수 있습니까?”
주방에서 땀을 흘리며 나오는 원장부인의 결심을 떠본다. 그녀는 빙그레 웃기만 한다. 나는 그녀를 정중히 현관 밖까지 배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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