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 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11월4일 서울을 출발한 사카베소좌의 서울토벌대는 고안(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양근(지금의 양평읍소재지)을 경유 11월6일 양평의 광탄에 도착하여 대기하다가 11월7일 새벽을 기하여 기습적으로 구둔치를 넘으려 했으나 그 곳을 지키고 있던 150여 의병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토벌대는 의병이 강력히 응전해 옴으로 일시 퇴각하였다가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2시간에 걸쳐 의병진을 향해 산포공격을 집중했다. 구둔치를 지키던 의병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진지를 적에게 내주고 말았다. 따라서 토벌대가 구둔치를 넘은 시간은 11월7일 정오 이후가 되었다. 그날 새벽 구둔치를 통과하여 설매실과 섬실에 있던 의병부대를 시작으로 삼산리 본진까지 공격하여 궤멸시키려던 서울토벌대의 작전계획은 어긋나고 말았다.

구둔치에서의 교전으로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설매실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진은 대피하였고, 섬실에 있던 의병진은 원주에서 출동한 토벌대와 교전하다 흩어진 후에야 석곡리 섬실을 통과하여 의병 본진이 있는 삼산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원주토벌대는 삼산리전투 하루 전인 11월6일 원주수비대의 우수이(臼井) 중위에게 20명의 병력과 경찰 7명을 주어 안창에서 양동, 즉 삼산리–원주간의 평해로변 등에 의병부대가 설치한 초소를 공격하여 토벌대의 공격을 받고 퇴주할지도 모르는 의병부대의 퇴로를 사전 차단하였다. 11월6일 급습을 받은 강원도 이운리와 판관대동 등지의 2~3리마다 요소(要所)에 초소를 설치하고 20~30명씩 보초를 서던 의병들은 토벌대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고 흩어지고 말았다. 한편, 11월6일 오전 2시 원주를 출발한 아까쿠라토벌대는 1개 중대와 가등(加藤)보조원 외 3명 및 순검(巡檢) 4명과 함께 횡성군을 경유 11월7일 양동면에 도착, 삼산리와 섬실에 있던 의병부대를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보병 1개 소대, 기병 6기로 토벌대를 편성한 춘천토벌대는 11월5일 경찰대와 합동, 춘천을 출발 홍천군에 도착한 후 11월6일 횡성군으로 이동 중 오전 10시30분경 홍천군 삼마치(三麻峙)고개의 300m고지로부터 1발의 총성과 동시에 의병 150명(韓兵도 섞여있었음)의 공격을 받자 교전하여 의병 7명을 사살하고 1명에게 부상을 입혀 화승총 2정을 노획한 후 11월7일 횡성의 상창봉(上倉峰)을 출발 서원면에 도착했으나 단애절벽(斷崖絶壁)의 산곡(山谷)으로 의병의 흔적이 없으므로 청운면 용두리(龍頭里)로 이동, 서울의 50연대소속 암좌(岩佐) 중위가 인솔하는 1개 소대를 만나 양동면 금왕리의 석우리(石隅里,지금의 돌모루), 율목곡(栗木谷,지금의 밤나무골), 월대리(月垈里,지금의 워리터)에 조정호(趙正浩)가 모집한 의병 400여명이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 벗고개를 넘어 양동으로 들어오다 이곳을 지키던 의병과 접전하여 돌파해 금왕리에 다다랐으나, 의병은 이미 2~3일전 주민과 함께 삼산리로 대피하고 없었다. 헛걸음을 한 토벌대는 이곳을 의병의 소굴로 인정, 18호의 가옥을 소각한 후 삼산리의 의병부대를 공격하려했으나 삼산리는 이미 서울에서 출동한 사카베소좌와 원주에서 출동한 사카쿠라의 부대에 의해 격퇴 궤주시켰다는 기병의 전령에 따라 11월8일 철수하였다.

원주토벌대의 양동작전(兩動作戰)은 먼저 출발시킨 토벌대가 평해로를 확보하여 퇴로를 차단한 다음 횡성을 경유하여 들어온 본대가 서울에서 온 토벌대와 춘천에서 온 토벌대와 합세하여 총공격을 가함으로써 주둔하고 있던 의병진본진을 꼼짝 못하도록 포위하여 재기할 수 없을 정도의 결정적인 피해를 입히려는 치밀한 전략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11월6일 일본군 토벌대가 평해로 송치와 이운리 판관대동 등에 설치한 초소를 급습해 오자 의병진은 강하게 저항하며 교전하였으나 끝내는 평해로를 적에게 내어주고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교전과정에서 주변지리에 밝은 의병들이 산속으로 흩어지고 겨우 평해로만 확보하는데 그친 토벌대는 솔안동(松內洞)의 의병거처로 쓰던 가옥 9채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다음날인 11월7일 9시부터 원주토벌대의 공격을 받은 의병진은 삼산리 일대에서 해가 질 때까지 내내 교전을 벌였다. 토벌대는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기마로 이동이 빨랐고 신식무기로 무장하였다. 개인화기는 미약하지만 수적으로 우세하고 지형지물에 밝은 의병부대는 나름대로 공격과 후퇴를 번복하며 잘 싸웠다. 11월7일 오후 늦게부터는 서울토벌대가 합세함에 따라 상황이 달라졌다. 서울토벌대가 새벽부터 구둔치를 넘어 공격해 오려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의병에 의해 저지당하자 일단 퇴각하였다가 산포공격과 함께 공격을 해 옴으로 결국 정오경에 구둔치를 내어주고 말았지만 본진과 다른 마을에 있던 의병진에게 대비할 시간을 벌어 줌으로써 의병의 피해를 많이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삼산리에 있던 주력부대는 원삼산과 속골, 분터골, 도소리, 솔치마을 등 곳곳에서 접전하였으며 주격전지는 도소리와 분터골을 잇는 다리부근이었다. 일본군은 원주로 퇴군하면서 분터골의 민가에 불을 지르는 만행도 저질렀다. 삼산리를 비롯한 양동주둔 각 의병진들은 열악한 무기를 가지고 11월7일부터 8일까지 토벌대와 수차례 교전하였는데 8일 오후 토벌대와 맞서 싸우던 삼산리부근의 잔여병력들이 게릴라전을 벌이다 모두 흩어지자 삼산리전투는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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