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 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백선 장군의 묘는 생가가 있던 청운면 갈운2리 하갈마을과 이웃한 갈운1리 아실마을의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하고 있고, 2008년 양평군에서 묘역을 정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백선 ‘절충장군 을미의병선봉장 경주김공 도제 자 백선 지묘, 배 숙부인파평윤씨 합부’라고 한글비석이 세워져있다. 이 비석의 우측면에는 ‘一八四九년 三월 十三일 생, 기일 二월 十五일’, 좌측면에는 ‘一八五十년 一월 六일 생, 기일 二월 十일’이라고 장군내외분의 음력 생년월일과 기일이 새겨져있는데 앞의 것이 장군, 뒤의 것이 부인이다. 그리고 비석의 후면은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다.

당초 한자였던 비석이 오자 등이 있어 바꿔 세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 아무리 한글세대라고는 하지만 한글로 ‘김공’이나 ‘도제 자 백선’, ‘합부’와 같은 내용은 그 뜻을 백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특히, ‘도제 자 백선’은 ‘도제의 아들 백선’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기일도 족보의 표시대로 쓴 것으로 판단되는데 족보의 기록이 틀린 것으로 보인다. 음력 2월14일(1896년 3월 27일)로 여러 기록들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백선의 묘소 바로 옆에는 말 무덤 하나가 있다. 전장을 누빌 때 타던 애마인 천비마의 묘이다. 김백선의 운구가 이곳에 도착하자 말도 주인을 찾아 혼자 제천에서 달려와 주변을 3일간이나 맴돌다 쓰러져 죽어 장사지냈다고 한다. 수많은 지평의 포수들이 목숨을 잃을 줄 알면서도 김백선을 따랐듯이 애마 또한 주인과 운명을 함께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말무덤에도 작은 묘비가 세워져있는데 앞면의 비제는 ‘천비마의 묘’이고, 뒷면에는 비문까지 새겼다.

양평이 내세우며 자랑하는 인물 중 한분인 평민의병장 김백선, 향토유적으로 지정까지 한 그의 묘에 세운 비석의 한글비제에 오해의 소지가 있고, 측면에 새긴 기일이 틀리며 공적내용 등이 포함된 약전 등 비문(음기문) 또한 없다는 점은 고장과 후손 등 우리 모두의 수치이다. 비제를 ‘折衝將軍 乙未義兵 先捧將 慶州金公 道濟 字 伯善 之墓, 配 淑夫人坡平尹氏 合祔(절충장군 을미의병 선봉장 경주김공 도제 자 백선 지묘, 배 숙부인 파평윤씨 합부)’로 하고, 음기문으로 다음을 참고하여 하루라도 빨리 비석을 새로 세울 것을 감히 제안한다.

‘장군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본명은 도제(道濟)이니, 백선(伯善)은 자(字)이다. 장군은 1849(己酉)년 4월 6일(음 3월 14일) 아버지 국용(國容)과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3남으로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 하갈마을에서 태어났다.

구척장신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로 성장하였고, 용감하고 민첩하기 이를 데 없어 용력(勇力)을 두루 갖췄으며, 명포수로 지평 일대의 산포수의 우두머리였다. 본래 학문과 명망이 높던 가문이었음에도 장군의 성장기에는 일시적 사정으로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장군은 명석하고 사리에 밝았을 뿐 아니라 오직 의(義)를 좇아 행동하는 기질이 강해 주위 사람들이 존경하며 따랐다.

장군은 1894(甲午)년 동학이 이 고을까지 확대되자 이의 소탕을 위해 지평현에 민보군(民堡軍) 약800명을 조직하여 훈련시키고 영솔장(領率將)이 되어 인근의 동학지도자를 잡아 징치(懲治)하고, 안성과 홍천 등지에서 동학군을 토벌하여 부근일대를 편안하게 하였다. 장군은 이 공으로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折衝將軍)의 첩지를 받았다.

다음해인 1895(乙未)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데 이어 임금을 강제삭발하고 지방에서도 단발령을 시행하는 등 인심이 크게 술렁이자 장군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여 국수보복(國讐報復)할 것을 결심하고 1896년 1월 12일(음 1895년 11월 28일), 이춘영·안승우와 함께 전국에서 최초로 지평의병을 창의하였다.

선봉장이 된 장군의 지평의병은 원주와 제천을 점령한데 이어 단양 장회협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영월에서 류인석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연합의진인 호좌의진으로 확대 개편하여 역시 선봉장이 되었다. 호좌의진은 충청의 중심지인 충주성을 점령하기까지 하였으니 장군의 공이 결정적이었다.

1896년 3월 27일 가흥(可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 공격작전을 수행하던 중 본진에 요청한 원군이 오지 않아 점령에 실패하고 끝내 패퇴하게 되자, 원군을 보내지 않은 중군장 안승우에게 거세게 항의하였고, 장군은 군기를 문란하게 하였다하여 1896년 3월 27일(음 2월 14일)처형되었으니 48세 때였다. 이로써 휘하 의병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의진이 동요하여 호좌의진의 급격한 쇠퇴를 가져온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당시 의병 내부에서 종종 발생하던 양반 유생과 평민·천민 간의 신분 갈등이 표출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을미의병은 50년간 지속된 한국독립운동을 견인하였고, 을미의병 중 가장 유력하게 일제와 친일내각에 영향을 끼친 의병진이 호좌의진이며, 호좌의진은 지평의병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지평의병과 호좌의진에서 선봉장으로 사생취의(捨生取義)하여 우리나라 독립에 기여하였으므로 정부는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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