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난순 양평문인협회 회원

남모르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을 찾아 꽃목걸이를 걸어주며 상을 주곤 했던 것을 오래 전 한 TV에서 본 적이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특별한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주인공들의 인터뷰는 친절도 관심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 친절과 관심 때문에 내 주변에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종종 일어난다.

공중탕에서 등 밀어주기는 물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지 않은 이들과의 언쟁은 나에겐 일상적이다. 또 길을 묻는 이가 있으면 웬만한 거리는 목적지까지 동행하기도 하고 짐 들어주며 통성명할 적도 많다. 이런 저런 일 때문에 약속시간에 늦어 때로는 지인들의 핀잔을 받기도 하지만 친절은 아무리 해도 도가 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친정에서 제사를 지내고 늦은 밤에 전철을 탔는데 의자 한 귀퉁이로 낯익은 사람이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마을 관공서에 근무하는 사람이었다. 지역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어 자주 들르는데, 직원 중에서도 정감 가는 인상 때문에 기억에 남아 있었다. 눈인사라도 하려고 살폈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옆에 앉자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차는 출발한지 얼마 안 돼 목적지 도착을 알리는데 그 사람은 아예 코를 골고 있었다. 저대로 두면 그냥 지나칠 것이 분명하고 열린 차문이 금방 닫힐 기세인지라 나의 투철한 친절심이 발동했다.

“이봐요, 주사님! 다 왔어요. 어서 내리세요.”

큰소리로 흔들어 깨웠다. 눈을 번쩍 뜬 그는 스프링에서 튕겨져 나오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황급히 나를 따라 나왔다. 대합실 쪽으로 올라가 개찰구를 통과한 후 역사 밖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물었다.

“댁이 어디쯤이세요?”

그런데 그가 대뜸 하는 말이 뜻밖이었다.

“청량리요.”

나는 깜짝 놀랐다. 청량리라면 여러 정거장 더 가야하기 때문이다. 머리가 띵해지면서, 과잉 친절 때문에 귀가길이 복잡해진 그에 대한 책임감이 스쳐왔다. 머릿속 시계의 초침소리가 빨라지고 있었다.

“어머, 나는 주사님 직장이 이곳이라 댁도 당연히...... 죄송해요. 어쩌죠?”

그때서야 상황 판단이 된 듯 주위를 휘둘러보던 그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괜찮아요.”

간신히 한마디하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사람 좋은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 길옆에 있는 택시를 향해 그를 독촉하며 뛰었다. 마침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아는 척하며 연유를 물었다. 자초지종을 말하자 버스정류장으로 달리는 내내 웃음을 참느라 킥킥거리며 “친절한 아즘씨 때문에 자네가 생고생이네!” 했다.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친절도 지나치면 남에게 폐를 끼친다는 말을 뼈저리게 되뇌었다.

정류장에는 마지막 버스가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버스 턱밑에 택시를 세우고 어서 타라고 등을 떠밀었는데 버스에 발 하나를 올리다 말고 느긋하게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왜, 왜요!”

겁에 질려 내뱉는 나의 말은 안전에도 없다는 듯 택시비를 내겠다며 바지 주머니를 뒤집고 있었다.

“내가 낼게 어서가세요. 어서!”

드디어 출발한 버스가 커브를 돌고 있는데, 시간을 지체해 화가 난 운전사의 야단을 맞고 있는지 그가 앞자리에서 고개를 떨어뜨린 채 앉아있었다. 아니, 기사의 잔소리는 아랑곳 안은 채 벌써부터 잠을 청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나의 관심과 친절이 없었다면 지금쯤 가족의 품에 안겨 편히 쉬고 있을 텐데.......

미안한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반쪽짜리 하얀 달이 히죽히죽 웃으며 따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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