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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隱遁)의 팔경(八景)(1) -이경엄의 사천장팔경(斜川庄八景)-

기사승인 2017.08.10  11: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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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평누비기 Ⅱ-영춘 이복재 경기도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옥사(獄事)가 끊이지 않았던 조선중기 광해조(光海朝)에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사대부들이 은거를 표방하면서도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도성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전장(田庄)을 경영하는 것은 은둔을 위한 현실적인 대처방안이었다. 이러한 근기(近畿) 전장의 경영은 당시의 유행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계택상월(谿澤象月)로 일컬어지는 조선의 4대문장가 중 3명, 즉 상촌 신흠(象村 申欽)이 김포에 감지정(坎止亭)을, 계곡 장유(谿谷 張維)가 선영이 있는 안산에 해장정사(海藏精舍)를, 택당 이식(澤堂 李植)이 지평에 택풍당(澤風堂)을 조성하였다.

이들은 모두 방축(放逐)되었거나 위험한 정국을 피하기 위해 가문의 연고가 깊은 선영이 있는 곳에 거처를 마련하였으며, 공교롭게도 이들의 선영이 모두 근기지역이었다. 양평은 남한강의 수로와 도성에서 관동을 잇는 육로인 관동대로가 연결되는 교통여건을 갖춰 접근성이 좋은 근기지역으로 비슷한 시기에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오봉 이호민(五峯 李好閔)의 아들인 현기 이경엄(玄磯 李景嚴)도 선영(연안이씨세장지)이 있는 양근(지금의 옥천면 용천리 일대)에 별서(別墅)인 사천장(斜川庄)을 정비하고 은거함에 따라 양평에는 택당 이식과 더불어 2명의 사대부가 은둔하게 되었다.

현기와 택당은 모두 1618년에 양평에 은둔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기의 은둔은 이보다 앞선 시기인 1613년 이전에 이미 별서와 장원을 경영하면서 이 일대를 ‘사천'이라 불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현기의 다음 시조 두 편의 쓴 시기가 각각 1613년과 1614년이고, ’사천노거사(斜川老居士)‘와 ’사천야작(斜川夜酌)‘ 등 사천이라는 지명이 들어간 내용을 통하여 알 수 있다.

<門岩黃犬>癸丑秋

門 바회 누른 개야 어 예 예완다 / 百二函關의 너 업다 아니랴 / 두어라 斜川老居士 너 우도록 살오리라

<斜川夜酌>甲寅春

斜川細雨딘 밤의 버들 만나 마니 / 山中風景이 일마다奇事로다./아희야盞브어라不醉憮歸리라.

현기가 사천팔경을 지정한 것은 1618년쯤으로 보인다. 팔경시는 스스로 짓기도 하지만, 주변 사람에게 부탁하여 팔경을 찬미하거나 소유주의 뜻을 칭송하는 시를 얻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현기는 본격적으로 팔경시를 부탁하기에 앞서, 당대의 이름난 화원이었던 이신흠(李信欽,1570-1631)에게 사천팔경을 화제(畫題)로 삼아 그림을 그리게 하고, 류희량(柳希亮,1575-1628)을 시켜 제목으로 ‘斜川庄八景’을 전서(篆書)로 쓰게 하였다.

사천팔경도는 사천일대를 그린 실경산수화이다. 용문산과 백운봉을 왼쪽상단에 그리고, 용문산에서 백운봉을 지나 지금의 양평읍과 옥천면의 경계가 되는 산줄기가 그림의 중간부에 그려져 있고 산줄기의 오른쪽에 양근군과 제탄 등 2곳을 나머지 8곳은 왼쪽에다 사실적으로 그렸다. 다만 제탄은 사탄천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의 하류가 아닌 상류인 산줄기의 오른쪽에 그려넣은 점이 특이하다. 지금의 제탄은 양서면 복포리에 있는 여울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는 붉은 글씨로 斜川(사천), 斜川庄(사천장)의 위치와 사천장8경의 위치를 적어 넣었다.

현기는 이 사천장팔경도를 먼저 그리게 한 뒤 소암(疎庵) 임무숙(任茂叔)으로 하여금 서문을 짓게 하고 남창(南窓) 김여경(金餘慶)이 글씨를 쓰게 했다. 그다음에는 도정절(陶靖節)의 사천십운시(斜川十韻詩)를 베껴 쓴 다음 아버지 오봉 이호민이 그 시에 차운하고 소서(小序)를 쓰도록 하고는 일족인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에게 시문을 구하여 사천장팔경도시서(斜川庄八景圖詩序)를 쓰게 했다. 사천장팔경도를 먼저 그리고 월사에게 부탁하여 팔경시문을 써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이렇게 사천장팔경은 일반적인 경우와 다른 절차를 거쳐 지정을 마쳤다. 그리고는 심희수(沈喜壽), 류근(柳根)과 같은 원로대인에게 시문을 구하였지만 광해조의 위험한 정국에서 대부분의 문사들이 향리 등에 숨어 살았기 때문에 뜻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기는 인조반정이 끝난 후 부터 많은 문인들로부터 여러 편의 시문을 받아 30여년에 걸친 과업을 통해 결국 춘하추동 4권의 『사천시첩(斜川詩帖)』은 완성되었다.

사천은 지금의 사탄천(沙灘川)을 이르는 하천의 명칭이기도 하지만 사탄천이 흐르는 유역일대를 통칭하는 마을이름으로 보아야 한다. 사탄천은 옥천면 용천리 용문산 서록에서 발원하여 남서방향으로 흘러 옥천리에서 소하천인 신복천을 합해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한강수계의 하천이다. 하천연장은 6.19㎞이고 유로연장은 11.68㎞인데 유역면적은 42.71㎢이다. 유역 상류지역에는 편전산과 봉재산 등이 있어 산지하천을 이루고 있으며, 중류지역에는 농경지와 취락지가 분포하고 있다. 하천의 경사도는 상류부가 1/31, 하류부가 1/134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유역 중·하류부에는 37번 국도가 하천을 가로지르며 지난다.

(이글은 학술논문 “李景嚴의 斜川庄경영과『斜川詩帖』의 의미 재론”〔김은정(서울대),2009〕을 많은 부분 인용하거나 참고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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