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시론> 용은성 편집국장

‘세한(歲寒)’은 ‘새해(설) 전후의 추위’, 곧 한겨울의 추위다.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그림의 제목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세한도’를 그렸다. 소박한 한 채의 집 좌우로 소나무와 잣나무 몇 그루가 서 있다. 단순한 구도지만 격조가 있고 느낌이 강렬하다. 의연한 정신과 고결한 기품이 흐른다. 그림에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라는 글이 적혀 있다. 논어 자한(子罕)에 나오는 ‘날씨가 추워진 뒤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는 뜻이다.

세미원 전 대표이사가 세한정(세한도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와 조성한 정원) 조성사업비로 내려온 경기도비 19억6000만원 가운데 3억8500만원을 빼돌린 혐의(업무상 횡령)로 기소돼 지난 20일 첫 재판을 받았다. 검찰은 세미원 전 대표이사와 전 팀장이 공모해 빼돌린 돈을 (사)우리문화가꾸기의 빚을 갚는 명목으로 유용했다고 밝혔다.

재판에서 피고 측 변호인은 “사실관계는 인정하나 공소사실은 전부 부인한다”고 했다. 보조금을 빼돌려 유용한 사실은 있으나 범죄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간곡히 호소드린다”는 표현을 하면서 세미원 현장검증을 재판부에 신청했다. “세미원은 정원 조성 특성상 예산을 먼저 집행하고 나중에 받아오는 구조이고, 결국 예산을 전용할 수밖에 없다”면서 “세미원을 꼭 와보시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또 “피고에게 오히려 큰 상을 줘야 할 것 같은데… 회계처리가 잘못된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또 “두물머리 불법 점거 시설물 철거 과정에서 개인에게 비자금 1억4000만원이 들어간 것도 마찬가지다. 예산을 전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채 지역사회에 나돌던 ‘세미원 전 대표이시가 이○○씨에게 1억원을 줬다’는 소문이 피고 측의 이 발언으로 사실로 드러난 셈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비자금은 불가피했다는 논리다. 국민의 세금이 불분명하게 쓰였는데도 말이다.

흔히 법관의 제일 자세로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든다. 모든 법관의 신념은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의 자세라는 것이다. 재판이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 공정한 판결이 나올 것이라는 의미다. 피고 측이 만일 법관의 이 역지사지 자세를 염두에 둔 것이라면 세미원의 현장을 둘러보는 것으로 사건의 본질이 혹여 흐려지거나 왜곡되지 않기를 바란다.

세미원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사립박물관협회가 주관하는 ‘길 위의 인문학’ 공모사업에 선정됐다. 세미원의 다양한 전통문화를 인문학적 교육과 체험을 통해 재미있고 알기 쉽게 우리의 전통문화를 향유하자는 취지다. 세미원이 운영하는 사은례(謝恩禮) 등의 전통문화 프로그램을 확대한 ‘세한도-마음을 담다’가 이번 인문학의 주제다. 추사는 제주도로 유배 와서야 새삼 권력과 인간과 의리에 대해 깨닫게 된 듯하다. 그리고 소나무·잣나무 같은 제자 이상적의 아름다운 절조를 칭찬하고 있다.

세미원 전 대표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던 불모지를 10년 넘도록 가꿔 지금의 훌륭한 정원으로 만들었다. 이 업적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이 업적으로 자신의 범죄혐의를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포장하려는 것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세한도에 나오는 송백(松柏)인 줄 알았더니 쉽게 시드는 잡목이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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