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부가 만난 사람> 이청정 ‘청일사’ 사장

60년 군장(軍裝) 가게 외길 인생

 

도록 도록 토로록… 바늘로 붓글씨를 쓴다. 거미 꽁무니에서 나오는 거미줄처럼 미싱 북실이 벌침 쏘듯 바늘을 따라 요리조리 실밥을 콕콕 박는다. ‘의사 김OO’ 궁서체 명필이다. 인근 병원에서 가운에 이름을 새기는 일이 들어와 가게 안 일감이 수북하다.

-오늘은 일감이 제법 많네요. 신문 값 벌어 놓으셨어요?

“이렇게 만날 앉아 노니 큰일이야. 밥도 못 먹겠어.” 일거리가 없다고 투덜대던 평소 때와는 표정이 사뭇 다르다. 1986년부터 양평교회 앞에서 ‘청일사’라는 군장판매소를 운영하는 이청정(76) 사장이다. 노상 약봉지를 끼고 사는 그의 이력은 남다르다.

“월남 갔다가 제대하고 광탄에서 명찰 가게를 하게 됐죠. 처남이 미싱을 사주고 가게도 차려줘서 1968년에 시작한 게 입때까지 하는 거야.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난 이거밖에 할 줄 몰라요. 이거해서 애들 셋 키우고 남한테 손 안 벌리고 살았는데 이젠 글렀어. 신형군복 나오고 명찰이며 사단마크, 계급장 다 찍찍이로 붙이니까 일이 없어. 요샌 도장 파서 가겟세 내는 형편인데…”

-요샌 제대 할 때 전우들이 패를 안 만들어 주나보네요?

“그런 거 없어진지 한참 됐어요. 예전엔 주당 10개는 보통 나갔죠. 하루 못해도 10만원은 가지고 갔는데… 요샌 내무반에서 돈 걷으면 큰일 나.”

작은 액자를 꺼내 먼지를 털던 이청정 사장이 말을 이어간다. “이게 허가증이야 재작년에 나온 건데 이거 받는데 50년 걸렸어. 우리가 하는 일이 군을 도와주는 일인데 허가증 없다고 괄시당하고 조사 나오면 도망 다닌 세월이 50년이야. 옛날에 너나없이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군대 물건 빼돌려 팔고 그러니까 헌병대 ‘CID’ 군치반원들이 고물상이나 군장가게 이런데 돌아다니면서 조사를 했어요. 난 아무 짓도 안했는데 군치반 떴다하면 조마조마하지. 군수품 단속법이 귀에 걸면 귀걸이잖아요. 평소에 밥도 사주고 용돈도 쥐어 주고 해서 잘 사귀어놔도 반장이 바뀌면 꼭 군기 잡는다고 세게 나오거든. 요샌 이거 있으니까 얼씬도 안 해. 오히려 장사가 안 돼 집적거릴 일이 없어서 그런가봐. 그래도 우리가 없으면 군대도 힘들지. 바느질도 해주고 군대 비품도 조달해 줘야 하는데 군대 유지하는데 우리네 같은 사람이 일등 공신이야. 그러니까 허가증도 내주는 거고 요즘 세상이 좋아진 것은 맞는데 재미는 없어 보여. 일도 기계가 다하고 도장도 기계가 파는데 뭐. 나는 손으로 하는 게 편해서…”

일흔보다 여든이 가까운 1942년생, 그의 군대와 인연도 양평살이 사연도 소설이다.

“살면서 없다, 없다 하잖우? 우리 집이 그랬어. 경북 상주에서도 산골 중에 산골인 사발면에서 태어났는데 땅 한 뙈기 없는 집에 8남매 중 막내아들이니 오죽하겠수. 아버지가 1년 내 남 농사짓고 벼 16가마 세경 받아오면 그걸로 살림하려니 콩잎 넣고 좁쌀 섞인 죽도 배불리 먹어본 기억도 없어요. 옷도 신발도 변변할 리 만무지 뭐. 난리통에 겨우 초등학교는 마치고 집안일 도와가며 겨울이면 나무해서 팔고 있는데 서울 가서 식당보이 한다던 동네 형벌되는 사람이 설날이라고 내려왔는데 옷이 번지르르하고 신발도 번쩍번쩍한거라. 밤에 그 집에 가서 형한테 서울 데려가 달라고 졸랐더니 나중에 데리러 온다 하더라구. 그때부터 나무를 하러가도 서울 생각만 나고 모든 게 재미가 없는 거야. 나무 한 짐에 30원 했는데 아주 하찮아 보이구… 참 마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가지고 언제 데리러 오나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데 소식이 없네. 그래서 부모님 몰래 쌀 한 말 정도를 퍼내서 밤중에 토꼈지. 양정역에서 기차를 탔는데 김천에 가니까 전기불이 번쩍번쩍하는데 눈이 획 뒤집히더라고. 완전히 딴 세상이지 뭐, 오갈 데 없으니 식당에 들어가서 심부름해줄 테니 밥만 먹여달라고 해서 얼마간 머물다가 김천역에서 서울행 열차를 몰래 타고 계단 밑에 숨었는데 대전역에서 역무원한테 붙들렸지. 경찰서로 넘긴다고 연락하고 수선을 떠는데 무작정 시내 쪽으로 달린 거야. 겨우 도망 나와서 걸식을 하고 다녀도 서울 가야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어. 또 대전역으로 숨어들어가서 서울행 열차를 탔는데 한참을 졸다가 눈을 뜨니까 용산이래. 사람들 따라서 내려 보니 쭉 앞쪽으로 가더라고. 나는 뒤로 돌아가서 철조망을 뚫고 나갔죠. 여기가 서울이구나 싶더라고. 15살 먹은 어린애잖아? 그런데 겁이 나는 게 아니라 그저 신나서 여기 저기 기웃기웃 돌아다니는데 군인들이 길게 서있더라고. 뭔가 하고 비집고 들어가서 보니까 어떤 양반이 미싱을 놓고 글을 새기는데 기가 막힌 거라. 가슴도 쿵쾅거리고 넋을 넣고 보다가 사장이 목포사람인데 만영이 형이라고 그 양반 보채서 밥만 주면 허드렛일을 하는 조건으로 취직한 거야. 월급이 어디 있나? 밥 주면 띵호와지. 이름 새기는 거 만날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좋겠더라고.”

양평읍 시민로에서 군장 가게 ‘청일사’를 운영하는 이청정 사장

-거기서 기술 배우신 거죠?

“처음엔 바느질만 했죠. 만영이 형이 이름 새기면 나는 명찰 달아주는 것만 했는데 한 5년 넘게 했어요. 그땐 용산역에 군인이 참 많았어요. 아마 내가 이름표 달아준 군인만 해도 몇 개 사단 병력은 될 걸? 어느 날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어떤 군인이 “야 너 청정이 아니냐?” 그러더라고. 자세히 보니까 동네 형이야. 얘기를 하다보니 우리 집에선 내가 죽을 줄로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뭐 5∼6년 연락을 안했으니까… 그러더니 그 형이 “내가 네 매형이야” 그래요. 우리누나랑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고 하하하. 그러곤 잊어먹고 사는데 어떤 할머니가 날 붙들고 ‘청정아’ 그러면서 막 우는 거야. 매형이 집에 연락을 해서 어머니가 오신 건데 어머니가 그동안 많이 늙어서 얼른 못 알아본 거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요. 설날에 내려 가고마 하고 헤어지고 그때부터 집에 연락을 했죠.”

-군대는 언제 가셨나요?

“1965년에 군대를 갔는데 훈련 마치고 강원도 7사단에 배치를 받았죠. 짐도 풀기 전에 인사계가 ‘월남 갈사람 손들어’ 그러더라고. 이등병이니 오죽 배가 고파 눈치를 보니까 동기 세 놈이 손을 드는 거야. 나도 손을 들었지. 그때 이등병 봉급이 30원인데 3원씩 걷어 넷이서 소주를 마시며 헬렐레해서 배 곪아 죽으나 총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가자고 했지. 공산군 물리치고 이런 거 사실 생각도 못했죠. 월남가면 미군이 밥 많이 준다고 해서 간 거지. 맹호사단 기갑연대로 배속돼서 홍천서 교육 받고 그해 10월 여의도에서 신고하고 부산에서 배를 탔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환송을 나온 거라. 그러니 학생들 동원되고 부모 형제 횐송객이 엄청 많이 왔어요. 나는 집에도 알리지 않았고 알려봐야 올 사람도 없을 테지만 환송식 한다고 좀 늦게 배를 탔는데 이미 식사시간이 끝났더라구요. 음식은 연대병력이 먹을 만큼 남았는데 미군들은 그걸 다 버리고 밥을 안주는 거야. 밥 잘 먹으려고 월남 가는데 첫 끼니부터 굶은 거지. 얼마나 서운 하던지 저녁 식사시간만 기다리는 거지. 저녁에 배식을 하는 데 줄이 끝도 없이 길더라고. 배식판을 들이밀면 고기 한 조각에 바나나 1개 등을 주는 데 푸짐한 게 없어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은 거라. 얼른 먹고 식판 대충 닦아서 뒤에 가서 또 줄 서고 식사시간 끝날 때 까지 도돌이표 하는 거죠. 며칠 그러니까 나중에 밥표를 주더라고 한번밖에 못 먹게. 한 일주일 지나 저녁이 됐는데 ‘퀴논’이란 곳에 도착했는데 엄청 겁을 주는 거야. 베트콩이 금방 총 들고 나오는 것처럼 나가보니까 개미새끼 한 마리도 없더구만요. 퀴논에 있는 앙케 고개 밑에 천막을 치고 진지를 만들어서 생활을 했죠. 매일 전투는 했는데 베트콩보다 더 무서운 게 모기더라고. 작전 이런 거는 우리가 모르잖아요. 헬기타고 뿌려 놓으면 명령에 따라 진격하고 우리는 공격하는 쪽이니 항상 노출돼 있고. 쟤네들은 숨어 있다가 나타나서 쏘니까 전우들도 많이 전사했죠. 월맹군 시신은 한 번도 못 봤어요. 실제로 공격해 들어가면 머리위로 총알이 뺑 소리를 내면서 지나가죠. 적은 안 보이는데 총알은 날아오죠. 이렇게 1년 있으니까 눈이 빨개지는 모양이더라고. 우리는 모르는데 신병들이 들어오면 그런 얘기를 해요. 아마 긴장이 오래되고 약이 올라서 그랬는지 고엽제 때문인지 몰라도.”

-월급은 많이 받았나요?

“우리 일병 봉급이 1불3센트였는데 우리가 받은 건 3센트고, 나머지는 본국으로 보낸다고 했는데 제대하고 어머니한테 받았느냐고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지 뭐. 1년 월남에 있으니까 본국으로 소환하더라고. 자원하는 사람은 남아도 되는데 행정병 말고는 지원자가 없더라고. 제대하고 용산에 다시 가니까 그 명찰집이 없어진 거야. 만영이 형이 병이 나서 양평으로 갔다고 하더라고. 광탄이란 데를 와보니 이 양반은 다시 원주로 간다 길래 그 집에 눌러 앉았죠. 그게 지금까지 온 거여요. 그때 광탄 헌병 초소장하던 이 하사가 ‘이씨, 여자 있어?’ 그러더라고요. 내 처지에 무슨 여자가 있겠어? 주변머리도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 없다고 했더니 자기가 중신을 서겠다고 하길래 그런가보다 했죠. 며칠 지나서 어떤 갈래머리를 곱게 빗어 넘긴 처녀가 군복을 들고 와서 맡기고 가는 거야. 명찰을 보니까 이 하사 옷이더라고. 나중에 옷을 찾으러왔는데 아우라가 보이는데 참 이쁘더라고. 나중에 이 하사가 집으로 초대해서 가보니까 처제라는 거야. 그 처녀는 내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싫다고 하는 걸 이 하사가 설득을 해서 내게 온 거지. 결국 손윗동서가 된 이 하사가 장비와 가게를 인수해줘서 양평에 뿌리를 내린 건데, 집사람하고 애 셋 낳고 행복했는데 15년 살고 먼저 가셨어.“

-고엽제 후유증 같은 건 없으신지?

그가 바지를 걷어 올리며 종아리며 발바닥을 더듬어가며 말을 이어 간다.

“없긴, 약을 아주 달고 살죠. 이게 내 살이 아니야. 발밑에 물주머니를 깔고 다니는 것 같아요. 약이 없으면 균형을 못 잡아요. 내가 상의 7급인데 원호대상자라서 보훈병원가도 공짜고 약도 거저 지어 요죠. 월남에서 모기가 달려들고 이가 득시글하니까 가려워서 죽겠지, 우리가 고엽제가 뭔지 아나. 밀가루 같은 분말인데 이걸 바르면 몸이 후끈했다가 시원해지거든. 안 바르더라도 살포 지역으로 작전 나가면 비가 오잖아요? 덥고 목마르니까 그 물로 씻고 심지어 먹기도 했는데 그걸 못하게 했어야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참, 양평에 280명 정도 상의 군인이 있어요. 모임하면 100여명 나오죠. 7급이 이 정도면 1~2급이야 심각하죠. 한 달에 53만원 받는데 국가가 이 정도 해주는 건 고맙지만 모임에 나가면 우리가 받은 월급 이제는 돌려달라는 주장이 높아요. 미국에서 받은 사병 월급을 나라에서 가져가 고속도로도 놓고 경제기반 다졌다잖아요? 죽기 전에 받아야 되요. 이런 말 하긴 싫지만 우리애가 40좀 넘었는데 당뇨도 심하고 문제가 많아서 사회생활 하기가 무척 어려워요. 요샌 우리 작은 딸이 손가락 관절에 통증이 심하다고 그래서 걱정이 많아요. 혹시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은데 말을 못 하겠어, 미안하고… 마누라도 나 때문에…”

말씀을 쭉 이어가던 그의 눈에 이슬이 감돈다. 

배달부=조병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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