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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沿革)을 통해 살펴보는 양평사(楊平史)(4) -양근(楊根)-

기사승인 2017.02.16  11:2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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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평누비기 Ⅱ-영춘 이복재 경기도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지방행정조직의 기초가 되는 면리(面里)는 고려 때부터 일부 시행하기 시작해 조선에 들어오면서 면리제(面里制)를 확대시켜 시행하여 오다가 조선말에는 갑오개혁과 함께 근대적 지방제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본격 시행되었고, 일제강점기에 군현과 동리(洞里)와의 중간 연락기관에 불과했던 면을 기초적인 행정단위로 성격을 변화시켜 지금에 이르는 제도이다.

『여지도서』 에 기록된 양근군의 면은 10개로 『해동지도』의 7개면에 북면(北面)ㆍ읍내면(邑內面)ㆍ고읍내면(古邑內面) 등 3개면이 추가되어 읍내면ㆍ고읍면(古邑面)ㆍ동종면(東終面)ㆍ서시면(西始面)ㆍ서중면(西中面)ㆍ서종면(西終面)ㆍ남시면(南始面)ㆍ남중면(南中面)ㆍ남종면(南終面)ㆍ북면 등이었다. 이어 1789년에 간행된 『호구총수』, 1843년에 간행된 『경기지』, 1863년 간행된 『대동지지』, 1871년 간행된 『경기읍지』, 1895년 간행된 『기전읍지』 등에도 10개면으로 기록되어있다. 양근의 10면 체제는 1908년 양근군과 지평군을 합해 양평군이 된 이후 1914년 4월 양평군이 12개 면을 관할하게 되는 행정구역 통폐합 직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리동(里洞)의 변천과정도 정리하여야 하나 우리말식 고유지명을 한자로 옮겨 적는 과정을 거치는 등의 이유로 워낙 리동명의 변동이 심하여 이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위에서 고구려시대 이후 양근의 연혁에 대하여만 기술하였다. 이유는 양근의 연혁에 관한 기록이 『삼국사기』지리지에 고구려로부터 기록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전의 연혁을 정리하기 위해서 양근이 속했던 상위지방조직인 도(道)나 목(牧)의 연혁을 찾아 인용하였다.

고려시대에 양근은 광주목에 속했고 광주목은 양광도에 속했으므로 양광도(楊廣道)와 광주목(廣州牧)의 연혁이 기록된 『고려사』 권56 .지 권10. 지리1. 등을 참고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양광도(楊廣道)는 본래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땅이었다.【한강(漢江) 이북은 고구려였다. 이남은 백제였다.】(이상은 양광도 연혁으로 이하 생략).”

“처음에 백제의 시조(始祖) 온조왕(溫祖王)이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 기원전 18에 나라를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다. 13년에 이르러 한산(漢山) 아래로 가 목책(木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이주시킨 다음 궁궐을 짓고 그곳에 살았다. 이듬해 도읍을 옮겨 남한산성(南漢山城)이라고 불렀다. 근초고왕 25년(370)에 이르러 도읍을 남평양성(南平壤城)으로 옮겼다. 이후 신라 태종왕(太宗王 : 무열왕)이 김유신(金庾信)을 보내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뒤에 당나라의 군대가 돌아가자 문무왕이 점차 그 땅을 수복해 한산주(漢山州)로 이름을 고쳤으며, 다시 남한산주(南漢山州)로 고쳤다. 경덕왕 15년(756)에 이름을 한주(漢州)로 고쳤다. (이상은 광주목 연혁으로 이하생략).“

지금까지 살펴본 자료를 토대로 양근의 연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본래 양근 땅이 속한 한강 이남은 백제의 영토였다. 백제가 한강이북을 점유한지 105년 되던 해인 475년(개로왕 말)고구려의 장수왕은 남정(南征)을 감행하여 한수 이남까지 영토를 확장함에 따라 새로 점령한 지역에 새로운 군현제도가 실시되므로 비로서 양근군〔楊根郡,항양(恒陽) 또는 거사참(去斯斬)이라고도 불렀다〕이 되었다. 그러나 551년(신라 진흥왕 12)에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함에 따라 양근을 비롯한 한강유역을 탈취했으나 다음해인 552년 신라가 동맹을 파기하고 한강유역을 점령하게 되어 신라에 속하게 되었다. 신라가 3국을 통일한 후인 747년〔경덕왕(景德王) 16〕 이름을 빈양(濱陽)으로 고치고, 소천군〔泝川郡,泝(소)를 沂(기)로도 썼으며, 후에는 기천군(沂川郡)이라했다.〕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옛 이름〔양근군〕으로 복구하였다. 1018년〔현종(顯宗) 9〕에 광주목에 내속(來屬)하였다. 1175년〔명종(明宗) 5〕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1257년〔고종(高宗) 44〕에 영화(永化)라고 불렀다. 1269년〔원종(元宗) 10〕에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자정(金自廷)의 고향(故鄕)이어서 승격시켜 익화현령(益和縣令)이 되었다. 1356년〔공민왕(恭愍王) 5〕에 왕사(王師) 보우(普愚)의 고향(故鄕)이므로 승격시켜 양근군(楊根郡)이 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 보우가 미원장(迷元莊)의 소설암(小雪庵)에 우거(寓居)하므로, 미원장을 현(縣)으로 승격시키고, 감무(監務)를 두었다. 얼마 후 땅이 좁고 인구가 적다고 하여, 다시 양근현에 소속시켰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에도 양근군이었는데 1658년(효종 9) 지평(砥平)에 편입시켰다가, 1668년(현종 9)에 다시 설치하고, 1728년(영조 4)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741(영조 17)에 복구하고, 1776년(정조 즉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785(정조 9년)에 복구하였다. 옛 치소는 건지산(乾止山)에 있었는데, 1747년(영조 23)에 갈산(葛山)으로 옮겼다. 1895년(고종 32)에 다시 군으로 고치고 읍내면(邑內面)ㆍ고읍면(古邑面)ㆍ동종면(東終面)ㆍ서시면(西始面)ㆍ서중면(西中面)ㆍ서종면(西終面)ㆍ남시면(南始面)ㆍ남중면(南中面)ㆍ남종면(南終面)ㆍ북면(北面) 등 10개 면을 관할하였다.

양평시민의소리 webmaster@ypsori.com

<저작권자 © 양평시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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