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칼럼 (최형규 서종중학교 교장)

최형규 서종중학교 교장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이 흘러나오고 대통령의 지지율은 역대 최저인 4%를 찍었다. 요즘 뉴스 보기 두려울 정도로 참담한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전국적으로 촛불을 든 국민이 100만 명을 훌쩍 넘어 200만 명을 바라보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데, 탄핵과 하야를 외치는 국민에게 청와대는 제대로 된 변명조차 못하고 있다. 모 국회의원의 바람과는 달리 바람에 촛불은 꺼지기는커녕 횃불이 될 태세다.

촛불을 든 국민들의 목소리는 남녀노소, 진보와 보수, 직업과 지역을 뛰어 넘는다. 광장을 가득 메운 다양한 시민들이 한결같이 요구하는 것은 주권자로서의 권리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나고 치욕적이지만 분노를 평화로운 축제로 승화(?)하고 있는 거리의 시민들이 이 땅의 참 주인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그 곳엔 우리 아이들 모습도 제법 눈에 들어온다. 처음엔 아이들의 집회 참여가 낯설게 느껴졌는지 모르지만 이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정도다. 부모와 함께 나온 아이들도 많지만 친구끼리 나온 아이들도 많다. 양평에서도 청소년들의 시국선언이 있었다. 청소년들의 시국선언과 집회는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얼마 전 경기도내 모 고등학교에서 시국선언을 한 학생을 징계하려고 해 논란이 된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다.

나이를 불문하고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모두 표현의 자유를 갖는다. 표현의 자유는 시민이 갖는 기본권 중 핵심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개인이 자신의 의사를 마음껏 펼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집회․결사의 자유와 연결된다. 시민의 입장에서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국민주권의 실천은 직접적인 참여에 의해 보장된다. 그래서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민주사회의 진정한 주인이다.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지며,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헌법 21조) ‘본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시할 권리를 보장(유엔 아동권리협약 12조)하고, 아동은 표현의 자유를 가지며(동 협약 13조), 아동의 결사의 자유와 평화적 집회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인정(동 협약 15조)’하는 등 우리 헌법과 국제법에 명시된 권리다.

학교에선 민주주의를 가르친다. 그리고 민주 시민으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그렇다면 시국선언을 하고 거리로 나온 청소년들을 격려하고 박수를 보내도 부족할진데 징계를 운운하는 건 교육자의 자세가 아니다. “시험이 걱정이지 않냐”는 질문에 “시험보다 나라가 더 걱정이다”라고 당당하게 답하는 수험생의 말에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공동체를 걱정하고 참여해 목소리를 내는 아이들은 우리 사회의 희망이다.

프랑스에선 학생들의 시위가 낯설지 않다. 지난 3월 프랑스에서 ‘해고여건 완화와 초과근무 연장’을 담은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는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이 때 100여 곳의 학교에서 수업을 중단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참여는 사회변화의 마중물과 같은 역할을 했다. 4·19혁명의 역사가 그걸 말해준다.

학교를 넘어 펼쳐지는 광장민주주의는 참 교육의 현장이다. 다양한 목소리가 공론화되는 광장민주주의가 지금 실현되고 있다. 거리에 나온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부끄러움을 가져야 한다. 어른들이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들었고, 청소년과 청년의 희망을 절망으로 변질시켰기 때문이다. 청소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면 ‘대견하다’거나 ‘기특하다’라는 꼰대 같은 말 대신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우리 대통령과 상반되는 대통령이 미국의 오바마다. 퇴임을 앞둔 상황에서도 50%가 넘는 지지율을 보이는 행복한 대통령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그리스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가장 중요한 직책은 ‘국민’이다. 우리가 사회의 하인이 아닌 주인이며, 우리에게 권리와 책임이 있다.” 이제 우리도 권리와 책임을 다하는 주권자로서의 ‘시민권’을 행사해야 한다.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는 책에서 ‘무관심이야 말로 최악의 태도’이며 ‘분노하고 저항하라’고 주장한다. 어느 대학 학생회가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시국선언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기사에 답답함을 느낀 적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 중립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구차한 변명이며 ‘시민권’의 포기다. 분노를 표현하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저절로 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권리의 확장은 권력을 가진 자의 시혜가 아니라 약자의 저항과 투쟁이었음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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